전 세계적으로 많은 차들 중에 유명한 수입차 독일 많은 브랜드차량 중에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가장 사랑받고 있는 브랜드는 당연 폭스바겐 차량일 것입니다. 오늘은 폭스바겐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폭스바겐-VW에 대해서

폭스바겐은 독일 니더작센 주 볼프스부르크(Wolfsburg)에 본사를 둔 자동차 제조 회사로 폭스바겐 그룹의 모체이기도 하다. Volkswagen은 독일어로 국민차를 뜻하는데 국민, 인민 등을 뜻하는 'Volk'와 자동차를 뜻하는 Wagen [4]이 연결 요소(linking element, interfix)인 -s-에 의해 서로 합성된 단어다. 중국에서도 이에 맞게 사명을 '따이 중'(大众/大衆, 대중)이라고 의역한다. 영어의 Folks, Wagon도 같은 의미에서 파생된 단어다. 한국어로는 한국에서 주로 쓰이는 자동차 회사 이름에 맞추어 국민차라는 의미로도 표현할 수 있다. 발음은 영어로는 대략 '복스왜겐' 정도로 하지만 원어인 독일어에서 알파벳 W는 /v/, V는 어두에서 /f/로 읽기 때문에 '폴크스바겐'(/'fɔlksˌvaːɡn̩/)이 된다. 그러나 폭스바겐 사 대한민국 법인의 공식 명칭이 '폭스바겐코리아주식회사'이며 이것이 대중적으로도 널리 쓰이기 때문에 폭스바겐으로 통칭하는 것이다. 회사 이름이 국민차라는 의미의 독일어 단어지만 실제로 서유럽을 비롯한 유럽 시장에서는 오펠, 스코다, 피아트, 세아트, 다치아 등 폭스바겐보다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판매하는 제조사들이 많다. 이러한 성향과 함께 대부분의 유럽 소비자들 사이에서 폭스바겐은 매스티지 브랜드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프리미엄 브랜드의 판매량이 크지 않은 유럽의 일반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폭스바겐을 현실적인 드림카로 분석하는 매체들이 많다.

역사

포르쉐를 만든 공학박사 페르디난트 포르셰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포르셰의 기반을 닦은 사람이었고 실제로 회사는 페르디난트의 아들 페리 포르셰가 창업했다. 그래서 폭스바겐과 포르셰는 사실상 한 몸인데 시간 순서를 따지고 보면 포르셰 쪽이 형이다. 나치당은 1933년 집권 후 중요 지지기반이던 노동자 계층의 환심을 사기 위한 여러 정책을 추진했다. 대공황의 여파로 발생한 대규모 실업자를 흡수할 공공 일자리를 만들어냈고 이들이 저렴한 비용에 다양한 레저를 즐길 수 있는 공공 복지 프로그램도 가동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나치당의 노동자 기관인 독일노동전선(Deutsche Arbeitsfront, 약칭 DAF) 산하에 공공 레저기관으로 1933년에 "Kraft durch Freude (환희를 통한 활력, 약칭 KdF)"를 설립한다. KdF는 저소득 노동자 가정들도 소정의 적립금만 내면 국가의 보조금을 더해 각종 공연 및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가난으로 레저 활동을 꿈꿀 수 없던 노동자 계층에서 이러한 정책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1934년에 벌써 230만 명이 가입하여 KdF가 제공하는 휴가 프로그램을 즐겼다. KdF는 이에 각종 리조트를 확보하고 여객선을 건조해서 다양한 레저 패키지를 구성하는 등, 사업을 확장한다. 히틀러는 한편으로 독일 노동자들이 독일에서 만든 저렴한 자가용 승용차를 소유하여 유럽을 자유롭게 오가게 만들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구상했다. 이를 위해 집권하자마자 공공 토목사업으로 아우토반 건설에 착수했고, 이어 1934년에는 페르디난트 포르셰 박사에게 노동자도 돈을 모아 충분히 살 수 있는 1,000 라이히스마르크 짜리 국민차를 만들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당시 독일의 민간 자동차 업체들은 고급 차량 중심의 라인업만을 갖고 있어서, 이 가격에 수지타산을 맞출 수 있는 업체가 없었다. 이에 이 프로젝트는 독일노동전선이 떠맡아 거액의 공공 보조금을 투입한 별도의 기업을 만드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이것이 폭스바겐 사 태동의 계기이며, 이후 1937년에 폭스바겐은 공식적으로 창립된다.# 그 사이 포르셰 박사는 결국 히틀러의 요구 조건인 어른 2명과 어린이 3명이 탑승 가능하며, 최고속도 시속 100㎞ 이상에 연비도 7L/100㎞[9]를 만족하면서도 구조도 최대한 단순화한 Typ 60 프로토타입 모델을 1935년에 설계해 낸다. 이 설계에 의한 시험차량은 1936년에 제작되어 1937년까지 약 3백만㎞의 주행 시험을 거치며 계속 수정되었다. 히틀러와 독일노동자전선은 이를 양산하기로 확정하고, 1938년 5월에 니더작센 주의 팔러스레벤에 대규모 부지를 마련하여 공장 착공에 들어갔다. 이것이 폭스바겐 사의 실질적인 시작이라 볼 수 있다. 이때 기공식에서 히틀러는 이 신차의 이름을 "KdF-Wagen(카데에프바겐)"으로 명명하고, 이듬해인 1939년부터 차량을 양산해 KdF 가입 노동자들에게 공급하겠다고 선언한다. 동시에 KdF는 독일 노동자들에게 대대적인 판촉 행사를 전개하여, 이를 구입할 수 있는 적립통장을 만들도록 권유했다. 이 KdF-Wagen은 차량 가격이 990 라이히스마르크로 책정되었으며, 적립통장 1권은 5 라이히스마르크 짜리 쿠폰 50장을 붙이게 구성되어 있었다. 노동자는 매달 여력이 되는 만큼 쿠폰을 구입해 적립통장 4권에 쿠폰을 모두 붙여 제출하면 KdF-Wagen을 받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공장이 가동되고 출고가 시작된 1939년에 곧바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실제 노동자들에게 공급된 차량은 고작 210대 남짓에 불과하다. 노동자들이 그간 적립한 돈도 사실상 독일의 전쟁비용으로 흡수되었다. 개전 이후 폭스바겐 공장은 즉시 군수공장으로 전용되어 퀴벨바겐, 슈빔바겐과 같은 군용차를 생산한다. 대전 기간 동안 퀴벨바겐은 약 52,000대, 슈빔바겐은 약 14,000대가 양산된다.이후 폭스바겐은 나치 독일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에게 강제 노역을 시켜 군용차 같은 군수품을 생산해 군에 납품한 전범기업이 되었다. 특히 폭스바겐의 팔러스레벤 공장은 노이엔감메 강제 수용소의 하위 수용소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한 프리츠 자우켈의 결정으로 폭스바겐은 보육 시설을 만들어 강제 수용소 수감자의 아이들을 수용했으나, 적절한 처우를 하지 않고 방치해 수많은 아이들이 질병이나 기아로 목숨을 잃었다. 이에 대해 폭스바겐은 한동안 다른 독일 전범기업들과 마찬가지로 강제 노역에 대해 전쟁의 불행한 결과이며 나치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하다가 1991년부터 강제 노역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1200만 마르크를 기부하면서 배상을 시작했다. 이듬해인 1992년 폭스바겐 이사회는 홀로코스트의 고령 생존자를 돕는 이스라엘 단체의 재정 지원에 노력하기로 약속했다. 또한 2000년 게르하르트 슈뢰더 정부가 '기억, 책임과 미래 재단(Stiftung Erinnerung, Verantwortung und Zukunft)'이라는 강제 노역 피해자 배상 재단을 설치해 이곳에 기부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한 후 연합군 산하의 관리에 들어가면서, 폭스바겐은 위기를 맞게 된다. 당시 포르셰 박사는 포드에 회사를 매각하려 했으나, 포드의 거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리고 포르셰 박사는 종전 후 전범으로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해야 했고, 아들 페리가 회사를 지켜야 했다. 이 와중에 공장 관할은 미국에서 영국으로 넘어갔고, 공장 설비의 처분권도 영국이 갖게 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소련이 그랬듯이 공장 설비를 다 뜯어내어 영국으로 가져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독일로서는 천만다행으로 당시 영국 자동차 업체들은 폭스바겐 생산 설비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또한 영국 육군 장교였던 이반 허스트(Ivan Hirst) 대령은 전후 폐허 위에서 생계가 막막해진 독일인들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남아 있는 생산 설비에 독일 노동자들을 다시 모아 독일 주둔 영국군에게 납품할 차량 생산을 재개하도록 한다. 이로 인해 당초 민수용 차량 설계대로 폭스바겐 1형(Volkswagen Typ 1) 생산이 재개되었다. 1945년에는 1,785대가 생산되었고, 점차 부품 공급망이 정상화되면서 1946년 3월에는 월간 1,000대 생산이 가능한 수준으로 복구되었다. 이들은 1946년까지는 거의 전량 영국군에게 납품되었으며, 독일의 민간 경제가 서서히 복구되면서 일반 독일 시민들에게도 공급되기 시작해 1947년에는 9,000대 이상이 민간 시장에 판매되었다. 이 폭스바겐 1형은 점점 개량되며 해외시장에도 진출했고, 폭스바겐 비틀이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어 미국 등에서 대 히트를 치게 된다. 1971년에 연간 130만 대가 생산된 것을 정점으로, 1998년에 2세대가 출시된 후에도 계속해서 생산되었고 2003년 7월 멕시코 푸에블라 공장에서 생산이 종료될 때까지 무려 2,153만 대가 출고되었다. 이러한 폭스바겐 비틀의 대박을 등에 업고 폭스바겐은 완전하게 부흥하게 된다. 그 뒤 공전의 초히트작인 전륜구동 해치백 폭스바겐 골프를 내면서 세계 최강자 반열에 든다. 이후 포르쉐에서는 비틀의 플랫폼을 가져와서 개구리 모양의 356이라는 스포츠카를 만들었다. 오리지널 비틀도 수평대향식(복서) 엔진을 달았고 356도 수평대향식 엔진을 달았으니, 완벽하게 궤를 같이하는 회사다.

기술

2000년대 초반부터 미국 보그워너(BorgWarner) 사와 합작하여 생산하는 듀얼 클러치 변속기(DSG/Direct Shift Gearbox)에 엄청난 집착을 보이고 있다. 물량 빨로 단가를 후려치는지 그 비싼 듀얼 클러치 변속기를 일부 대형 차량(페이톤이나 투아렉)을 제외한 거의 전 라인업에 쑤셔 넣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폭스바겐의 일반적인 DSG는 허용 토크의 낮은 한계치 때문에 크고 아름다운 토크를 자랑하는 대형 차량의 엔진과 조합할 수가 없다. 단 고급 스포츠카 등에 들어가는 다른 듀얼 클러치 변속기는 허용 한계치가 높다. 가까운 예로 폭스바겐의 형제 회사인 포르셰의 듀얼 클러치 변속기인 PDK만 봐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폭스바겐 그룹의 또 다른 자회사인 부가티의 슈퍼카 부가티 베이론 슈퍼 스포트에 들어가는 DSG는 1,200마력, 150kg.m이 넘는 미친 출력을 감당한다. 그런데 2014년 그것조차 뛰어넘어 최대 허용 토크를 끌어올린 대형 승용차 10단 DSG를 개발할 거라고 발표하였으나, 2015년 9월에 개발 포기를 선언했다.디젤게이트로 20조 원에 달하는 벌금을 물 위기에 처하자 연구 개발 역량을 아무래도 축소시키는 듯하다.

 

폭스바겐은 신뢰와 발명, 그리고 디자인이 어우러져 지울 수 없는 여행을 만들어내는 드라이빙의 예술을 대표합니다. 폭스바겐의 세계를 탐험하다 보면 품질과 고급 기능, 그리고 특출난 자동차에 대한 열정을 공유하는 글로벌 커뮤니티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드라이브가 완벽함과 발명, 그리고 순수한 드라이빙의 즐거움의 축제인 폭스바겐의 세계를 향해 건배해 보십시오. 단순한 자동차를 넘어 도로 위에서 탁월함을 의인화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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